"그림자 이끌고/ 떠나가야겠네/ 이 비를 몰고 온/ 구름을 따라" ―장필순 '그리고 그 가슴 텅 비울 수 있기를' 중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무를 것만 같은 날들이 있었다. 태양은 중천으로 향하고 시간은 미지의 설렘을 담아 반짝이던 그때, 웃음과 노랫소리는 높았다. 막 벙그는 꽃처럼 마음은 붉게 흐드러졌다. 그 뜨겁고 화려한 날이 모두 지난 뒤엔 무엇이 남는가. 가수 장필순은 '그 이후'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퇴락의 긴 그늘을 조용히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가슴이 생기를 잃고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어 삶이 하찮게 느껴질 때, 불 꺼진 방에서 홀로 이 노래를 들어보라. 애써 밀쳐뒀던 쓸쓸함이 살아와, 볼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질지 모른다.
28년 전, 시간에 대한 관조적 시선을 담은 '어느새'로 화려하게 데뷔한 장필순은 이제 인생의 늦은 오후 어디쯤에 서 있다. 목소리엔 그녀의 오래된 거처, 제주도의 고적한 풍경이 스며 있다. 잠결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몽환적 키보드 사운드 위로 나직하게 시작하는 노래는, 이렇게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다. "외롭지 않니?/ 귓가를 스쳐가는/ 젖은 바람이 물어온다."
제주의 어느 철 지난 포구와 인적 없는 한라산 자락을 돌아왔을 젖은 바람이, 문득 외롭지 않으냐고 묻는다. 관계의 타성과 아늑함에 빠져 잠시 잊고 있었을 뿐, 외로움은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장필순은 삶을 조용히 응시하며, 스스로 맞아들인 외로움이 견딜만한 것인지 묻는다. 그 물음은 쓸쓸하면서도 애틋하다. "외로워도 괜찮지 않니?"라고 마음을 어루만지기 때문이다.
질문은 이어진다. "슬프지 않니?/ 우산을 두드리며/ 빗방울들이 물어온다." 외로움을 숙명으로 감당해야 하는 인간에겐, 우산을 써도 가릴 수 없는 슬픔이 있다. 바람과 빗방울은 외로움과 슬픔이라는 저 오래된 가계(家系)의 자손들이리라. 노래는 달빛, 새벽, 안개, 침묵과 같은 고즈넉한 단어들을 불러내며 침잠한다. 가수는 그 단어들이 달아날까 봐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가만가만 노래한다.
그리고 존재는 정처 없이 흐르는 것이므로 "그림자 이끌고" 어디론가 떠나려 한다. 그곳은 "이 비를 몰고 온 구름을 따라" 가는 길이거나 "안개가 씻어낸 길"이다. 구름이 가는 길은 덧없고, 안개가 씻어낸 길은 아스라하다. 곁엔 낡고 해진 구두처럼 오래 묵은 그림자가 하나 있을 뿐이다.
장필순은 윤기가 빠져나간 가슴에 희망을 다시 채우듯, 봄의 기억들을 호출한다. "우리 가슴 속에/ 씨가 퍼져 날리길/ 꽃이 피기를/ 새들이 날아들기를" 낮은 음성으로 간절하게 노래한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인생의 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해가 이미 기울기 시작했으므로.
노래의 마지막 당부에 이르면 눈이 아려온다. "우리 가슴속에 강물 흐르길/ 늘 살아있기를/ 늘 깨어있기를." 부디 모두 그럴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노래는 그 모든 소망마저 버리고 마침내 무욕의 바다로 흘러들으려 한다. 제목이자 노래를 맺는 가사는 이렇다. "그리고 그 가슴 텅 비울 수 있기를." 삶의 뜻 없음과 덧없음을 서정적 언어로 교직해낸 노래는 아름답고도 슬프다. 노래가 끝나면 가수의 바람과 달리 가슴엔 아릿한 무언가가 가득 차온다.
노래가 실린 장필순 7집 앨범은 2013년에 나온 비교적 근작이다. 6집 발표 후 11년 공백을 깨고 발표한 이 앨범은 충분히 오래 걸어온 사람의 향기가 곳곳에 스며 있다. 외로운 방랑의 길마다 그 향기가 퍼져나갈 것이다. 노래가 마지막에 이른, 외로움도 슬픔도 희망도 없는 저 먼 무욕의 바다에서 삶은 마침내 자유를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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